한국 전통 기념일 & 문화

[한국 전통 기념일]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전라도편

windsoundstory 2025. 8. 19. 09:24

한국 전통 기념일인 정월대보름 하면 흔히 부럼 깨기, 오곡밥 먹기, 달맞이 등을 떠올리지만, 지역에 따라 지신밟기라는 독특한 민속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도 많다.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지신밟기를 단순한 민속놀이로 보지 않고, 한 해 농사의 성패와 마을의 안녕을 좌우하는 중요한 의례로 여긴다.

[한국 전통 기념일]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전라도편

다른 지역에도 지신밟기 풍습이 존재하지만, 전라도의 지신밟기는 구성 방식, 음악의 분위기, 절차 등에서 특별한 차이를 보인다. 이번 글에서는 전라도에서 전승되는 지신밟기의 역사와 의미, 실제 절차, 구성요소, 그리고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속에 담긴 공동체 정신을 살펴본다. 단순히 흥겨운 놀이로만 보기엔 아까운, 깊이 있는 전통 의식이 지금도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지신밟기란 무엇인가 – 마을을 지키는 땅의 신에게 올리는 의식

지신밟기는 ‘지신(地神)’이라는 땅의 수호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전통의식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엔 신이 있다고 믿었고, 그중에서도 마을과 집터를 지키는 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신밟기는 설이나 정월대보름 같은 새해의 중요한 시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서서 각 집을 돌며 굿과 노래, 춤을 통해 땅의 신을 달래고 액운을 쫓는 의식이다. 일반적으로 꽹과리, 장구, 북, 징 등으로 구성된 풍물패가 중심이 되며, 각 집 대문 앞에서 짧은 굿판을 벌인 후 복을 기원하는 덕담을 남긴다.

지신밟기는 단지 흥겹고 시끄러운 풍물놀이가 아니다. 농경 사회였던 과거 조선 시대에는, 땅이 곧 생존의 기반이었기 때문에, 그 땅의 기운을 맑게 하고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신밟기는 일종의 마을 단위 제례이며, 마을 전체의 건강과 풍요, 재물운, 자손의 복 등을 기원하는 집단적 의식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정초부터 대보름 사이에 시행됐지만,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정월대보름 당일 저녁에 맞춰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라도 지신밟기의 가장 큰 특징 – ‘굿과 놀이의 경계 없음’

전라도 지역의 지신밟기는 여타 지역에 비해 굿과 놀이의 경계가 유난히 모호하다. 이는 전라도 특유의 흥과 민속 예술적 감성이 반영된 결과다. 전라도 지신밟이에는 ‘덧굿’ 또는 ‘놀량’이라고 불리는 굿놀이 형식이 포함되며, 이때 풍물패는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작은 연극과 퍼포먼스를 곁들인다. 예를 들어, 집주인에게 “올해는 금송아지 두 마리 들어온다”는 식의 유쾌한 덕담을 하거나, 집 앞에서 과장된 춤을 추며 웃음을 유발한다. 마치 풍물놀이와 연희극이 결합된 하나의 민속극처럼 펼쳐진다.

또한 전라도 지신밟기에는 즉흥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풍물패의 상쇠(리더)는 각 집의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멘트와 연주 분위기를 조절한다. 어떤 집에서는 경쾌한 장단으로 흥을 돋우고, 다른 집에서는 느릿한 진양조 풍으로 정중하게 의식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처럼 ‘맞춤형 지신밟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라도의 지신밟기는 단순한 전승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정을 나누고, 한 해를 함께 시작하는 유대감을 다지게 된다.

 

 

 

덕담의 방식도 다르다 – 복을 ‘노래처럼’ 전달하는 말재주

전라도 지신밟기의 또 다른 특징은, 각 집에 전하는 덕담의 방식이 거의 ‘노래’에 가깝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복 많이 받으세요”, “만사형통하세요”와 같은 말이 전해지지만, 전라도에서는 풍물패가 덕담을 창(唱)처럼 외치며 흥을 이끈다. 예를 들어 “이 집은 올해 복이 터졌네~ / 금덩어리 쏟아지네~ / 애기 낳아 장원급제~” 등의 가사가 멜로디처럼 이어진다. 이런 형식은 마을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고, 주술적 언어가 아닌 감성적 언어로 소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집주인이 풍물패에게 정성껏 준비한 떡이나 음식을 건네면, 풍물패는 감사의 뜻으로 한 번 더 신명 나는 장단을 연주하고 짧은 덧굿을 펼치는 것이 관례다. 이러한 주고받는 덕의 순환 구조는 단순한 전통 예절을 넘어, 공동체 속 정서적 유대와 예의범절을 현대까지도 전승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는 “이 집 도련님은 복덩이~ / 장가 잘 가고 복 쌓을 상이네~”와 같은 멘트로 축복을 건네며 어른들로부터 웃음과 박수를 받는다. 이처럼 덕담과 놀이는 전라도 지신밟기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다.

 

 

 

전통을 잇기 위한 현재의 노력 – 지신밟이, 잊혀지지 않도록

전라도 지역의 많은 마을에서는 여전히 지신밟기를 매년 정월대보름 전후에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고령화와 인구 감소, 아파트화 등으로 인해 이 풍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각 지자체에서는 향토문화재로 지정하거나 문화예술단체와 협업하여, 지신밟기 시연 및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전주시, 나주시, 순천시 등에서는 매년 문화행사로 지신밟이를 재현하며, 학교나 복지관에서 아이들과 어르신이 함께 참여하는 세대 간 전승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한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풍물패 활동을 이어가는 지역 동아리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지신밟기를 현대식 공연과 결합하여 축제나 관광 프로그램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의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지신밟기의 ‘정신’과 ‘흥’을 현대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것 역시 큰 의미를 갖는다. 땅의 신을 밟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복을 나누는 문화로서의 가치를 계속 이어가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야말로, 전통이 단절되지 않게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방식일 것이다.